

스노우드롭
2017. 7. 1.
라기/세이지 신오 스피드조각글 텍스트 무작위 정리
"포켓몬 승부의 즐거움을 상기시켜주는 트레이너이기를 바란다!"
"가능할지 모르겠는데..."
화분 하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쇠내음이나, 전깃불이 타오르는 찌릿찌릿한 탄 냄새가 올라오는 경기장 한 가운데로, 짐리더 전진이 라이츄를 내보내었다. 관동 출신의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포켓몬, 피카츄가 진화한 형태이다. 꺼낸다면 파치리스라던가 뭐 그런 포켓몬일 줄 알았는데 사용하는 첫 수가 익숙한 포켓몬이라. 업무 외에는 포켓몬에 대해서 아직 그렇게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닌지라 신오지방의 포켓몬에는 풀타입 포켓몬을 제외하면 대부분 지식이 전무한지라 오히려 잘 된 일이였다. 빠른 스피드로 교란시키며 필드를 헤집고,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상대의 포켓몬을 강한 전압으로 지져버린다. 뾰족한 꼬리는 번개를 다루기에도 안성맞춤인 피뢰침.
무대에 오른 라이츄는 맹렬한 기세로 울면서 넓은 뒷발로 그라운드를 탕, 탕 쳤다.
"텐션 낮은 트레이너로군. 시시한 배틀은 좋아하지 않아. 제대로 해 봐."
"자, 그럼.... 오늘은 하리가 힘내주도록 하자."
발치에 '견학'이라고 오밀조밀하게 까만 글씨와 플로랄 패턴이 자수되어있는 턱받이를 두른 이상해씨라던가 묘하게 의욕이 없어보이는 도전자의 모습에 전진은 꽤나 실망했는지, 혹은 기만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따져왔으나 곧이어 라기의 뒤에서 빼꼼히 쳐다보다 뾰코뾰코 소리를 내며 라이츄의 앞에 선 도치마론을 보자마자 실소를 지었다. 고작 도치마론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고작 도치마론인데도 제법 쌓인 레벨이 신기하기 때문일 것이었다. 근처의 컨테이너박스에 걸터앉아있던 짐리더는 그제서야 일어나 검은 코트 끝자락에 붙은 먼지를 결벽적으로 털어내고 있는 특이한 도전자의 맞은편에 섰다.
"라이츄, 전광석화!"
"하리, 바늘미사일!"
승부를 개시하는 휘슬이 울리자마자 전진이 빠르게 팔을 뻗어 라이츄에게 지시하였다. 곧이어 자세를 낮춘 라이츄가 도치마론의 품으로 파고들어왔다. 한 턴 늦게 준비된 바늘미사일이 도치마론의 사방으로 뻗어나가 라이츄에게 스치듯 피해를 주었지만, 그 충돌한 대미지로 허공에 보기 좋게 작은 몸이 붕 떠올랐다. 체급도 스피드도 기준 미만. 레벨으로 우세하더라도 라이츄의 연륜이나 전진의 배틀센스는 도치마론을 충분히 제압하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적당히 봐 주겠지.'
처음보는 포켓몬 배틀에 눈이 휘둥그레해져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벨의 상태를 확인하며 라기는 팔자 좋은 생각을 했다. 배지 수나 트레이너카드의 별의 개수만 보더라도 자기는 좋은 반열에 오른 트레이너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경력이 좋지 못하면 경험 또한 부족한 트레이너라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트레이너를 '격파'하기 위해서가 아닌 '가르치기'위해서 존재하는 짐리더라면 라기의 상황을 어느정도 봐 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번개로 치명타를 노리기 좋은 타이밍에 라이츄는 대신 매끄럽게 꼬리를 휘어 몇 발 뒤로 물러나 다음 타격에 견제하고 있었다. 일합을 겨룬 뒤 이번에는 라기 쪽에서 다시한번 손을 뻗어 지시하자, 바닥에 안정적으로 착지한 도치마론이 길게 덩쿨을 뻗어 라이츄에게 달려들었다.
"덩쿨채찍!"
"고속이동!"
이정도의 덩쿨 정도는 껌이지. 라이츄가 반쯤 웃는 낯으로 바닥에서 낮게 튀어올라 질주하기 시작했다. 선명하게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른 행동이었다. 라기는 그 기세에서 멈추지 않고 하리에게 평소의 다운 된 목소리를 한 톤 정도 높여서 외쳤다.
"돌아!"
길게 뻗은 덩쿨이 곧이어 파도를 타는 것과 같이 움직이더니 경기장을 가득 채울만큼 부풀어 길어졌다. 그와 동시에 도치마론이 풍차와 같이 제자리에서 한번 크게 빙 돌기 시작하였고, 예상하지 못한 규모에 당황한 순간 회피할 틈을 못 잡은 라이츄를 후려쳐서 바닥에 나동그라지게 만들었다. 곁에서 이상해씨의 감탄 섞인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라기는 한번 더 외쳤다. 반동으로 뛰어! 한바퀴 더 회전하고 있던 하리가 높이 뛰었다. 짐리더는 이번에는 봐줄 기세가 없었다.
"번개!"
"머드숏!"
엄청난 기세로 몰려온 벼락구름 사이로 사나운 번개가 공중의 도치마론에게 내리쳤다. 놀라울 정도의 위력에 명중률이었으나 간발의 차로 진흙을 몸에 두른 도치마론에게는 별 타격이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번개를 시전하느라 꼬리를 바짝 세우고 있었던 라이츄에게 단단하게 뭉친 진흙이 사방에서 날아오기 시작하였고, 몸이 젖은 라이츄는 데굴데굴 바닥에 구르다 힘없이 쓰러져 누워버렸다. 잠시간의 정적 후에 도치마론의 승리 판정을 알리는 깃발이 들어올려지자, 경기장에 흩날린 도치마론의 진흙을 일회용 우산으로 막고 있었던 라기는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교환 없이 계속 진행할 것을 선언했다.
"한마리로 격파할 셈?"
"견학하는 꼬마가 있어서요."
"이렇게 싸워야 한다, 라고 나를 상대로 가르친다는 걸까."
"그것보단 이런 무서운 걸 할지도 모르니 배틀같은 건 포기해, 라는 걸 가르쳐 주려고요."
라기의 퉁명스러운 대답이 뭐가 우스운지 전진은 한참 웃은 뒤 반짝이는 눈동자로 허리춤에 있던 하이퍼볼을 경기장에 던졌다. 드러난 것은 렌트라. 덩치만큼 강인하고, 오감이 예민하고, 트레이너에게 충성스러울 포켓몬이었다. 척 봐도 전진이 레귤러를 굴릴 때 제대로 사용하는 멤버일 것이다. 한 번 라이츄를 상대했을 때 봐주었으니 이제 넉넉하게 넘어가지는 않겠지. 온몸에 전격을 두르고 수라와 같은 모습으로 달려든 렌트라에게 무서운 기세로 부딫혀 저만치 날아가는 도치마론을 바라보며 라기가 매섭게 소리쳤다.
"여기서 네가 쓰러지면 시작한 의미가 없어! 듣고 있지 하리!"
잔뜩 그을린 상태로 바닥을 털고 일어난 도치마론의 까만 눈동자가 모래먼지 사이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입으로 내뱉지 않아도 아니까 짜증나게 그러지좀 마. 그런 불만을 담아서 짧게 울음소리로 대답한 하리에게 다그치듯 라기가 머리를 쓸어넘겼다. 짐리더는 이미 자신을 시시한 트레이너에 분류하는 것은 포기한 기백이었다. 그렇다면 하리, 라기도 그 열기에 보답할만큼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발치에 있는 이상해씨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부터 제대로 감상해야 돼.
"우드해머!"
한 송이 꽃이 피어나듯 도치마론의 등 언저리에서 거대한 줄기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공미포 2343
느긋한 걸음에 속도를 좀 더 붙였다. 오늘 밤 안에는 무쇠게이트를 지나서 무쇠시티에 도착하고 싶었다. 세이지는 호흡기에 걸쳐서 장기 대부분에 동상을 입은 적이 있어 한겨울 노숙만큼 목숨줄을 위협하는 것이 없었다. 슬슬 체온이 떨어지고 있는 기분이 들어 발치에서 언 땅을 밟고서도 폴짝폴짝 뛰며 잘 따라오고 있는 이브이를 들어 품에 안았다. 기분 좋게 고롱거리는 작은 울음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앞발이 세이지의 품에 포개졌다. 날이 추워도 불꽃타입 포켓몬을 고생하며 엔트리에 들여놓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브이인 데이지 덕분이었다. 잠재파워라는 것은 포켓몬의 잠재능력이나 본질 같은 것도 품고 있는데, 여러가지의 타입 중에서도 데이지가 품은 잠재능력은 불꽃이었다. 지금은 어설프게 불꽃을 뿜어내는 정도이지만 기술머신으로 가르쳐주었던 잠재파워에도 익숙해진다면 더 불꽃 사용에 능숙해질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데이지가 부스터로 진화해주는 방법도 있었다.
"있잖아, 데이지.""삑?""역시 불꽃의 돌 구해올테니까, 부스터로 진화하는 건 어때? 너 재능있어 보이고...""삑!!!"
맹렬하게 고래를 휘젓는 이브이를 보면서 세이지가 난처하게 웃었다. 틈날 때마다 세이지는 이브이에게 부스터로 진화하지 않겠냐고 권하곤 했다. 하지만 그 많은 이브이의 진화 형태 중에 하필이면 부스터라는 카드를 드는 것이 유난히도 싫은 것인지 데이지는 온몸으로 싫은 의사를 표현했다. 부드럽고 풍만한 목 언저리의 갈기, 불꽃을 연상시키는 윤기나는 선홍색의 보드라운 털. 강철도 얼음처럼 녹여버리는 뜨거운 불꽃을 내뱉는 능력. 세이지의 판단으로는 부스터는 대단히 매력적인 포켓몬이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싫다는 형태를 강요할 수는 없었다. 소년은 이브이의 트레이너였지만 이브이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은 할 수 없겠지만, 어쩌면 조만간 이브이도 근사하게 진화할 수 있겠지. 가능하면 이브이가 원하는 형태로, 몸에 사랑스러운 리본을 두른 페어리 타입 포켓몬으로 진화했으면 좋겠다.
"하긴, 딱히 불꽃 타입으로 진화하지 않더라도 적당히 사용할 수 있으면 괜찮지. 잠재파워 같은 걸로.""삐이."
작게 콧소리를 내며 몸을 감아 품 속에 코를 박는 이브이를 한번 더 힘있게 끌어안고 세이지는 무쇠게이트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새어들어오는 찬 바람을 막아주고 있는 터라 게이트 안은 바깥보다는 덜 서늘했다. 간간히 날아가는 주뱃들이 어둑어둑한 바깥을 향하고 있었기에 새삼스레 해가 진 시간이 한참인 것을 깨닫게 했다. 그 외에 보이는 포켓몬은 대부분이 꼬마돌 같은 호연에서도 익숙하게 발견했던 종이었다. 그러고보면 꼬마돌을 도감등록 했었던가. 지나가다 가볍게 시비걸어오는 녀석이 있으면 지체하지 말고 포획해야지. 주머니에 있는 몬스터볼의 개수를 체크하면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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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볍게 시비걸어오는 녀석은 아니나다를까 존재했다. 만만한 이브이와 함께 걸어가는 허약한 인간 소년을 노리고 뛰쳐나온 꼬마돌은 무쇠탄갱을 벗어나는 게이트 앞에 버티고 서서 우렁찬 목소리로 울부짖고 근처의 돌을 굴렸다. 세이지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얼굴에 잔뜩 미소를 걸치고 물러나 허리춤에서 개굴닌자의 몬스터볼을 꺼내 던졌다. 모습을 드러낸 개굴닌자는 익숙한 자세로 팔을 휘둘러 물수리검으로 날아오는 작은 바위들을 튕겨내고 꼬마돌과 트레이너의 거리가 벌어지도록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래야 야생의 포켓몬이지!"
대부분의 포켓몬은 평화를 사랑했지만 야생에서 사는 포켓몬은 사람의 접근에 놀라 튀어나오거나, 변변찮은 이유로 시비를 걸어오거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사납게 나서는 일이 잦았다. 트레이너 수행을 시작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스릴있는 것 중 하나가 이런 야생의 공격적인 포켓몬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이런 포켓몬과 마주하는 것을 나름대로 즐기고 있는 것을 아버지나 형이 알게된다면 당장 집으로 귀환시키기 위해 메타그로스 같은 포켓몬 위에 타고 날아올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입 밖에만 내지 않으면 괜찮았다. 만만한 이브이 대신 버티고 선 개굴닌자의 기백에 당황한 꼬마돌은 이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우왕좌왕 움직이고 있었다.
"적당히 손보자, 적당히. 꼬마돌 포획할 거니까!"
명랑한 트레이너의 목소리에 개굴닌자가 목에 두른 혓바닥을 조용히 움직여 입 안으로 집어넣으며 세이지를 한 번 바라보더니 신체의 물방울을 손가락 끝으로 훑어 작은 물수리검을 생성해냈다. 이어서 주먹을 쥐고 달려드는 꼬마돌에게 정확히 그 수리검을 미간에 명중시켰고, 세이지는 그 틈에 깔깔거리며 몬스터볼을 던져 꼬마돌의 데이터를 도감에 갱신할 수 있었다. 도감 작업은 순조롭네.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재차 걸음을 옮기자 곧 반대측 게이트에서 들어오는 가로등 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드디어 무쇠시티이다.
"도착하면 포켓센에 숙소부터 부탁해야지."
그리고 또 뭘 하면 좋을까. 체육관 도전 수속이라도 밟으면서 짧게 지인들에게 연락을 넣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에뜨와르에게도 은비에게도 아직 소식을 물어보지 않았지만, 지나가며 기어의 소식 타임라인에서 설기의 이름을 얼핏 목격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 녀석도 설산캠프 끝내고 신오를 여행중인걸까. 해가 모습을 감추고 꼬박 몇 시간이나 지났지만 아직 잠들 시간은 아니었다. 전화하면 받을 수는 있겠지.
공미포 912
여행 첫 발을 떼는 것이 이렇게 힘들었던가. 다른 수속을 마치고 나서 출발하니 오후 9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손에 쥔 기어에 등록한 타운맵을 좀 돌아보았다. 222번 도로 근처에 입지호수가 있고, 그 주변에 호수 구경이 좋은 민박이 여러 채 있다고 했다. 휴가철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시기이니 여행경비도 크게 부담이 없겠고, 겨울의 호수가 보이는 곳으로 숙소를 잡는다면 내일 아침해는 기분좋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어두운 가로등을 따라서 계단을 내려가자 결이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해변이 작은 민가의 선을 따라 저만치까지 이어져 있었다. 높이 솟은 바위 위에서는 밤낚시를 즐기고 있는 트레이너들도 있었기에 늦은 시간에도 겨울해변에서는 조금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파도가 차갑게 밀려들어오는 것을 반복하는 소리를 듣던 라기는 주머니에서 몬스터볼을 만지작거리다 자신의 라프라스를 바다 위에 띄워 꺼내주었다.
"큐우우."
"이럴 때 아니면 미려는 나오기 힘들테니까."
배려에 고마워요. 라프라스가 고운 소리로 울면서 라기에게 감사를 표현했다. 머쓱하니 머리를 꼬던 라기는 라프라스가 보일 정도로 느슨히 해변에서 떨어져 걸었다. 물살을 헤치는 지느러미가 움직이는 선이 어둠 사이에서도 선명하게 보여 한 폭의 그림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라기에게 라프라스라는 포켓몬은 특별했다. 사랑동이나 게을로와는 다른 의미로, 수컷 라프라스 카이만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어린 소녀를 구해주고 살펴주어 지금의 부모님에게 인도해준 포켓몬이었다. 지금은 많이 나이가 들어 관동의 포켓몬 타워에 한 다발 꽃을 벗삼아 잠들어 있었지만 지금의 여행을 함께 하는 미려의 모습이나 노래소리를 듣고 있자면 곧잘 카이만이 생각나곤 했다.
"좀 더 포켓몬에게 빨리 익숙해졌으면 좋았을까.
그랬으면 카이만이 살아 헤엄칠 수 있을 때 같이 여행을 떠나거나 하면서 추억을 만들 수 있었을텐데."
감상에 잠겨있는 사이에 해변은 금방 그 끝에 다다르고, 파도소리를 뒤로 하고 수풀 사이로 진입할 때가 되자 미려는 헤엄치는 것을 다소곳하게 멈추고 라기가 자신을 불러들이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말 없이 한번 라프라스의 곧은 뿔을 쓰다듬고 조심스럽게 몬스터볼을 내밀어 그 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시하였다.
"플로젤이네."
앞서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던 이상해씨가 폴짝 그 자리에서 뛰어 도도도 달려와 반대편 나무 뒤에 숨는 것을 보고 미심쩍게 풀숲을 뒤져서 확인한 것은 수로 반대편에서 건너오고 있는 덩치가 큰 플로젤이었다. 눈대중으로 보아하니 근처에 둥지를 짓고 생활하는 무리의 아버지 플로젤이었던 것으로 추측되었다. 본의아니게 뛰어간 이상해씨가 영역을 침법한 것이 심기불편해보이는 모양인지라 라기는 작게 한숨쉬고 별이 뜬 하늘을 즐기며 여유롭게 걷고 있던 하리를 불렀다.
"하리, 도와줘."
우아한 시간을 방해받은 도치마론의 시선은 팍 식어있었다. 나 말고 발치에 돌아다니는 풋내기한테 좀 시켜. 작은 코가 움찔거리면서 의사를 표현했지만 라기는 맹한 표정의 이상해씨가 때려잡을 수 있는 포켓몬은 꼬렛 정도가 아닐까 싶은 의견이었다.
"그런 눈빛 하지 말고. 벨이 저만한 덩치의 플로젤을 내쫓을 수 있을리가...."
"....마아."
"무사히 민박 도착하면 내일은 「하리 스페셜 도시락」 준비해 줄게."
저기압으로 낮아져있던 도치마론의 귀가 도시락 소리에 번쩍 들어올려졌다. 음식으로 포켓몬을 쥐락펴락 하면 좋지 않은데. 라기의 도치마론은 소식은 소식했지 식탐이 많은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포켓몬은 트레이너와 어느 부분은 분명 닮은 꼴이라고 했던가, 하리는 '많이 먹는 것' 보다는 '양보다 질'인 쪽이었다. 간단명료하게 말하자면 고급스러운 입이다. 라기가 제안한 하리 스페셜 도시락은 엄선해서 고른 쓴맛 나무열매들을 곱게 슬라이스해서 다른 과일들과 섞어 속을 채운 후르츠 샌드위치로 라기와 하리가 특별한 외출을 할 때, 예를들면 벚꽃 구경이나 불꽃놀이 같은 것을 보러갈 때에나 솜씨 발휘해서 만들어 챙기는 고급 도시락인데, 재료값이 만만하지 않아 평소의 피크닉에는 준비해주지 않는 메뉴였다.
"모처럼의 휴가이고 지나가면서 입지호수 근처에서 겨울 피크닉이라도 하자.
날씨 춥겠지만 따듯한 차를 챙기면 괜찮을 것 같고, 관광지니까 관리되는 야외 테이블이라던가 분명 있을거야."
정중한 제안에 하리는 머플러를 고쳐매고 자신의 입가를 톡톡 만지며 고민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물줄기를 쏘아보내며 내내 작은 이상해씨를 괴롭히고 있던 플로젤에게 긴 덩쿨을 휘둘러서 강한 시선으로 제압을 시작했다. 내일 아침은 도시락 준비해야하니까 일찍 일어나야겠네. 민박에 부탁해서 페리퍼 택배로 산지직송 나무열매를 익일특급으로 주문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입지호수 근처에 여럿 서 있는 민박 중에 가장 높은곳에 위치한 민박이 오늘 묵을 장소였다. 라기의 마음에 쏙 드는 아주 신식인 건물은 아니었지만 하얀 벽돌에 드문드문 새겨진 세월은 겨울의 호수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민박의 여주인은 젊은 유부녀였고, 늦은 시간 찾아온 라기에게 방의 열쇠와 함께 갓 우려낸 녹차와 용암전병을 몇개 건네었다. 라기는 여주인에게 어색하게 웃어 목례하고 그릇을 받아 물에 촉촉해진 이상해씨와 도치마론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하얀 프레임에 흰 레이스 커튼을 보기좋게 장식한 일인실은 소박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침대시트도 문제없어 보이고 욕실도 깨끗했다. 라기가 벗은 코트를 옷걸이에 단정하게 걸어두고 옷가지를 챙겨 욕실으로 들어간 사이 하리는 달달 떨고 있는 작은 이상해씨의 씨앗 위에 보들보들한 타월을 올려주고 부분부분 얼기 시작한 구석이 안전하게 녹아내리기를 기다려주었다.
"어두우니까 바깥이 잘 안 보이는 게 아쉽네."
한참 뒤 더운 목욕을 하고 나온 라기가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훔치며 졸고있는 벨의 곁을 지키던 하리에게 여유롭게 말을 건네며 침대에 앉았다. 대답없이 작게 하품하는 도치마론을 욕실로 안내해 준 뒤에 잘 자는 이상해씨의 상태를 확인했다. 한겨울에 까다로운 플로젤에게 물벼락을 뒤집어 쓰고 돌아다닌 덕분에 얼어붙은 부분의 씨앗이 작게 짓물러 있었다. 이대로 자면 내일 벨의 상태가 걱정이어서 라기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드라이기로 말려 건조시킨 뒤 가방에서 케어용 오일을 꺼내 물렁해진 부분에 곱게 발라주고 티슈를 얹어주었다. 한층 편안해진 이상해씨의 표정을 확인하는 사이에 보송해진 하리가 욕실에서 나와 라기의 근처에 앉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드라이와 브러시를 꺼내 곁에 앉은 도치마론의 털을 빗겨주기 시작했다.
"오늘은 물가체육관에서 수고했지. 고마웠어."
".... ...."
"하리를 제외하면 전기나 발빠른 포켓몬들에게 약한 포켓몬들이 많으니까, 내 엔트리에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야. 새침하게 눈을 감은 하리가 작은 목소리로 한 번 울었다. 적당히 털이 건조해지고 결 좋게 정리되자 라기는 빗을 정리해 넣고 다 식은 녹차로 목을 축였다. 곁들여진 용암전병은 그새 두마리의 포켓몬이 간식 대신 먹어치웠는지 가루뿐이었지만 시간도 시간이니 입이 아쉽지는 않았다. 침대에 기대어 오늘의 모험노트를 정리하고, 휴대폰 어플으로 패리퍼 통신을 이용해 오늘 묵는 민박에 이른 아침까지 영원시티 산지직송인 아바열매와 자뭉열매를 한 세트 주문했다. 화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온 하리가 푹 잠에 빠져들었을 즈음에야 그녀는 부모님께 메일을 전송하는 하루일과를 그럭저럭 끝낼 수 있었다.
"라기라기라니 이상해."
"호칭이 싫어?"
"그렇게 장난스럽게 나를 부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심심한 세계에 살고 있네. 여름 꽃잎 같은 소녀가 겨울의 밤하늘 곁에서 속삭이듯 말을 붙여왔다. 신스라는 소녀에 대한 자신의 감상은 어떠한가. 라기는 사람을 대하는 것에 신중한 타입이었다. 좋지 않게 말하면 낯을 심하게 가리는 사람이었다. 한여름 얕은 원피스 끝을 잡고 맨 발으로 뛰어 잔디밭 위에서 춤출 것 같은 이 아가씨는 여름의 세계가 어울리는 모습이었지만, 서 있는 무대는 그 어느 계절보다 창가에 서리가 일어나 붙는 겨울인 것이 확실했다. 곁다리로 들었을 때 어느 대단한 전통이 있는 답답한 집안이라고 하였던가. 소녀가 서슴없이 누군가를 끌어안는 모습도 자주 본 적이 있어 그런 화원에서 저렇게 꽃대를 높이 들고 넓은 잎을 피워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라기는 산장을 벗어나 신스의 뒤를 따라 걸었다. 심심하면 눈을 쏟아붓던 신오에서 거의 처음으로 볼 수 있었을 맑은 하늘에는 하얀 별이 수놓아져 자연의 기품을 과시하고 있었다. 앞서 걷고 있는 소녀가 부드럽게 눈을 밟는 소리가 얼핏 멈추었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라기는 차분히 시선을 움직여 신스를 바라보았다. 곧 예쁜 입술이 움직였다. "내 소원부터 말해줄까?" 이어진 소원은 라기가 상상한 귀여운 소녀의 소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죽을 걱정 하지 않고 살고 싶어. 물론 언젠간 죽겠지만."
"요즘은 죽을 걱정 하고 살고 있다는 소리겠네."
"어떨까?"
여름장미색 눈동자가 곱게 휘어서 자신을 바라보았다. 실로 소녀의 장미 가시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미소였다. "너 정말 너처럼 웃는구나." 감추지 않고 내뱉은 감상평에 신스는 뭐가 재미있다고 싱글벙글 웃었다. 이번의 여행도 이 아가씨는 가출을 감행한 것일까, 아니면 집안에서 정정당당하게 허락을 맡고 뛰쳐나온 것일까. 라기의 입장에서는 알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소녀에게 그런 문제를 이야기하며 잔소리나 걱정을 할 만큼 가까운 위치도 아니었다.
"내 생각엔 넌 장수할 거야."
"별님에게 소원을 빌어서?"
"뿌리가 깊다고 생각하거든. 겉은 장미꽃 같지만 민들레처럼."
맨손이 찬 공기에 붉게 물들어가자 코트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라기가 속삭였다.
"그럼 그것부터 같이 빌어볼까. 신스가 가능하면 발 뻗고 잘 수 있기를."
알고 지낸지 12개월도 지나지 않은 것 같지만, 세이지 프로스트는 눈치를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생각없이 내뱉은 별의 감상에 시아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아에게도 앗차키자리에 엮인 이야기의 결말은 결국 각색을 거치지 않는다면 외로운 슬픈 이야기인 것인가. 세이지는 작년 호연 캠프에서 도서관에서 발견한 시아와 첫 만남을 가졌을 때부터 그는 한결같이 겨울의 유리호수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가워서 속에 따듯한 것을 품기는 어려울 무심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보기보단 감상적인 사람인 걸까, 아니면 자신이 시아에게 어느정도의 의미를 가진 사람이 된 걸까, 그동안 시아의 내면도 무언가 바뀌게 된 걸까. 아무렴 상관 없었다. 그가 건네준 한 마디는 소년을 꽤 기분좋게 만들었다.
"좋아해. 그런 거."
"각색된 내용이?"
"각색 그 자체를 좋아한단 소리야."
마음에 안 들면 바꿀 수 있다는 소리잖아. 세이지가 덧붙이며 여전히 묵묵한 표정의 시아에게 환하게 웃었다.
"지난 늦여름에 병원에서 눈뜨고 나서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긍정적이군."
"사람의 미래란 건 결국 개척하는 것이지! 이런 걸 진취적이라고 하던가?"
시아가 덧붙여오는 말은 없었으나 소년은 그것을 무언의 긍정으로 듣고 넘겼다. 세이지는 눈이 녹아 신고있던 가죽부츠 위에 물으로 고여있었기에 가볍게 털어내고 곁으로 다가온 이브이를 들어올렸다. 따듯한 털 속으로 자신의 손을 밀어넣자 차가운 기운에 귀를 쫑긋 세웠으나 곧 익숙해졌는지 자세를 편하게 잡는 이브이를 한참 주물럭거린 뒤 세이지는 시아에게 다시 말을 붙여왔다.
"유성우에 소원 빈다면 뭐 빌고싶어? 예를들면 안전여행 기원이라던가!"
"음....."
"라기 누나가 그러던데 관동 사람들 여행만 떠나면 사건사고가 끊기질 않는다며?"
"왠지 호연에서 할 것 같은 이벤트를 하네."
"춤 추는 게?"
"콘테스트 같잖아."
팜플렛을 확인하며 미묘한 표정으로 세이지가 대답했다. 꽃맞이 축제에서 다섯가지 어트랙션에 모두 참가하면 지급한다는 특별 포켓몬이란 것에 관심이 있어서 도전하고 있었던지라, 뭔지도 모르고 페어가 필요하다는 말에 덥썩 신청한 것이 무드 있는 조명 아래서 춤 추는 것이었다니. 시아와 세이지의 사이에서 그런 연출이 가능한가? 같이 낚시를 하거나 화관을 만들거나 뭐 그런 부류의 활동이라고 상상했기에 이런 루트는 생각치도 못했다. 뒷머리를 긁적이던 소년은 무심한지 다정한지 모를 표정으로 자신의 발치에서 치근거리는 이브이, 데이지를 내려다보던 시아를 힐끔 바라보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춤 출 수 있어?"
"너는."
"사교댄스라면 이론공부는 한 적 있어.
춰 볼 체력은 없더라도 배워는 두라고 했었거든."
무도회장이나 출 법한 그런 댄스 말이다. 세이지는 멀뚱히 쳐다보는 시아에게 손짓하며 있다가 회장에서 보자, 한 뒤 데이지에게 손짓하고 먼저 걸어 의상대여실 쪽으로 걸어갔다. 시아가 신고 있던 가죽부츠 끝을 이로 잘근잘근 씹으며 못살게 굴던 이브이가 곧 시원스런 목소리로 울며 뒤를 따라 폴짝폴짝 뛰어갔다. 소년 뒤를 쫓아가며 콘테스트장의 님피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바퀴 빙그르르 도는 것이 세이지보다는 데이지가 훨씬 더 이벤트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카운터에 앉아 있던 점원과 짧은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간 내부는 의상의 천국이었다. 이정도로 제대로 갖추는 것도 어려울텐데, 주최회에서 무도회를 좋아하는 누군가가 큰 손을 썼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관동에서부터 칼로스까지의 체육관 짐리더들의 코스튬까지 있었으나 세이지는 루네 출신의 챔피언인 그 누군가의 의상이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그쪽으로 기웃거리기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결국 무난하게 파티 수트 코너에서 검은 턱시도를 찾은 소년은 이브이가 털을 스스로 골라 단장할 때까지 그것을 갖춰 입었고, 보기 좋게 하얀 데이지가 장식된 검은 레이스 리본도 대여해서 이브이의 왼쪽 귀예 예쁘게 묶어주었다.
"데이지도 엄청 단장하네. 누구랑 춤 추려고?"
"삐이잇."
"시아네 형 에브이?"
삐이! 이브이 룰렛 팜플렛 구석의 에브이 그림을 앞발로 두드리던 데이지가 한번 더 건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아의 포켓몬들은 몇 번이나 구경하곤 했지만, 이브이가 진화한 포켓몬을 데리고 다니던 것은 그랜드 플라워에서 만난 푸른하늘색 리본을 나풀거리던 예쁘장한 님피아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라기에게 들었던 말로는 시아가 가장 레귤러로 채용하는 이브이의 진화형은 에브이라고 하였고, 꽃맞이 축제에 와서 시아의 어깨에 자주 앉아있던 카일렛의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어쩌면 그 애를 대동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데이지를 품에 끌어안고 캐비닛 열쇠를 챙긴 소년은 시계를 힐끔 보고 걸음을 부지런히 했다. 시아와 약속했던 시간은 금세 다가오고 있었다.
*
그리하여, 보기 좋게 차려 입은 소년 둘은 마주섰지만, 첫 댄스를 어떻게 시작할지 세이지는 감도 잡지 못했다. 상상보다 능숙하게 하얀 정장을 차려입은 시아의 모습은 세이지가 보기에도 근사했기에, 곁을 스쳐지나가던 아가씨들이 기웃기웃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선율이 바뀌어 부드럽고 가벼운 음악이 회장에 돌기 시작했다. 눈치만 보는 주인이 답답했는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데이지 쪽이었다. 이브이는 조그마한 앞발을 내밀어 딛더니 상체를 숙이고 시아 곁을 지키고 있는 에브이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작은 이브이에게 댄스의 요청을 받은 에브이는 곧 시아를 힐끔 쳐다보더니 사뿐사뿐 걸음을 내딛어 음악에 맞춰 춤추기 시작했다.
"하하, 나보다 능숙하네."
"어쩔거야?"
"뭐 어쩌긴 어째."
여기까지 왔는데 안 출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한 발 늦어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자신의 이브이를 바라보던 소년은 곧 몇번이나 예법 책에서 읽은 것처럼 손을 올리고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마주 서있는 시아에게 윙크했다. 돌아올 반응이야 퍽 좋지 않을지도 모르고, 시아의 춤 실력은 호연지방 콘테스트에서 잠깐 본 정도밖에 없으나 어찌되었건 그 역시 꽃맞이 최대의 상품에 관심은 있을 것이다.
"춤 추자."
그렇다면 자신과 발은 맞춰줘야 하지 않겠는가.
-
"꽃맞이 축제라면, 꽃을 맞이하는 쪽의 이벤트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춤춘다는 것으로, 꽃을 표현...했다는 것이라던가...."
"그런 쪽도 있긴 하지만."
향로 부스에서 신상 꽃향로들을 구경하던 라기가 이플의 대답에 시큰둥한 목소리를 냈다. 춤이라던가, 연고시티의 귀여움 콘테스트를 끝내고 난 뒤라면 앞으로 20년 전후는, 아니면 평생 출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붙임성이 없는 라기의 입장에서는 상품을 수집하기 위한 미션 중 가장 걸림돌이 될지도 모를 종목이었다. 우왕좌왕하고 있던 차에 이플이 도와주겠다고 나서주어서 한 숨 돌렸지만. 향로의 근처에는 장미꽃 향기를 은은하게 품은 오마모리(부적)도 판매하고 있었기에 라기는 선뜻 가격을 지불하여 그것을 사서 이플의 손에 쥐어주었다. 소녀가 무엇인지 의문을 가진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라기는 여행안전기원 부적이래, 하고 가볍게 대답하고 머뭇거리다가 선물이라고 덧붙였다.
"의상은 어떻게 할 거니?"
"드레스...라던가 입어야겠지요."
"회색축제 생각나네, 그때는 코스튬 의상 같은 거 입고 다녔었지."
라기는 잠시 몇 년 전의 축제를 기억해냈다. 이플과 페어가 되고, 제대로 교류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그 쯤으로 라기의 첫 여행 중에 회색시티의 근처인 달맞이산에서 열린 축제였다. 그 때에는 무지개시티의 짐리더인 민화가 자주 입던 후리소데 입었었지. 생각해보면 본인 성격에 짐리더 코스튬이라니 부끄러운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구나 싶었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 생각할 틈 없이 재미있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번 축제에서는 그런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라기는 오마모리를 가방속에 챙겨넣는 이플에게 말했다.
"저녁에 시작하니까 그 때 만나자.
좀 더 같이 쇼핑하고 싶은데, 나 그때까지는 리그의 업무 봐야해서."
"요즘도... 일 많으세요?"
"휴가중이라 한가로웠지만 여기 꽃향기마을이니까."
자신이 축제에 참가한 건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 챈 건지. 평소라면 휴가받은 사람에게 또 일손을 빌리려고 든다며 있는 짜증 없는 짜증은 다 부렸을텐데, 축제에서 이플을 만난 것은 아로마테라피를 받은 것과 같았다.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온화한 표정으로 반대편의 향수 부스를 기웃거리며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의자매에게 말했다. 그럼 먼저 갈게.
*
포켓몬 리그의 소속원들은 협회의 체계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자유분방하고, 널널하게 일한다는 인상이 강했지만 모두가 그렇게 팔자 좋게 생활한다면 리그라는 조직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이 많으면 분명 그만큼의 일을 처리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라기가 어느쪽인가 하면 놀지 않는 쪽이었고, 덕분에 소속도 아닌 신오리그에서까지 헬프를 받아 꽃을 만져댄 것은 정오가 훨씬 지나 저녁 무렵까지였다.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하리를 흘겨보며 라기는 의상실에서 대충 머리를 빗어 단장시키고, 잘 꺼내서 장식하지 않는 메가스톤이 부착된 흰색 장미 코사쥬를 머리카락에 고정시켰다.
"드레스, 이상한 곳 없지?"
메이크업까지 확실하게 마치고 일어나 쪽빛의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상태로 살짝 돌아보며 하리에게 말하자, 불편한 듯이 레이스 머플러를 만지작거리는 도치마론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사인을 보내주었다. 신은 힐의 굽까지 확인하고 나니 준비는 끝이었다. 연이어 진행해왔던 콘테스트 때문에 익숙해져서일까, 치장한 상태에서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앞서 걷는 트레이너를 따라 도치마론은 화단을 지나, 무도회장 건물으로 들어섰다.
"라기 언니."
"이플."
반짝이는 내부 조명 밑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이플은 평소보다 한껏 차린 모양새였다. 라기의 입장에서는 남들 보여주기 아쉬울 정도였다. 회장 안에는 감미로운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고, 여러 사람들이 한창 춤을 즐기고 있는 상태였지만 붐비지는 않아 넉넉히 들어가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라기는 별 거리낌 없이 화사하게 웃고 이플의 손을 잡아 나긋나긋하게 그 사이로 걸어들어갔다.
"약속대로 한 곡 추자."
남자 파트 못 하면, 내가 하면 되니까. 이플의 손 끝을 잡고 능숙하게 첫 스탭을 밟으며, 라기는 화사하게 웃었다.
"이거 방금까지는 이런 내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원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잖아."
"글 쓰는 재주는...없단 말이야."
라기는 난감한 표정으로 화면을 쳐다보았다. 방금 가란의 손을 거쳐 돌아온 소설의 내용은 어느새 느와르에서 촬영물로 내용의 변화가 진행되어버린 뒤였다. 이걸 무슨 수로 잇지? 힌트라도 달라는 듯한 표정으로 옆에서 빈둥거리는 세이지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가란을 응시했지만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은근슬쩍 근처 부스에 있는 기적의 씨앗을 구경해야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할 수 없이 라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판을 차곡차곡 누르기 시작했다. 망하면 곁에서 팔자 좋게 시비걸고 있는 소년에게 떠넘겨버리면 될 것이었다.
*
"바로... 증오라는 것을."
지상의 오로라에 빗댈 수 있을만큼 아름다운 밀로틱의 비늘이 반짝였습니다. 내뱉은 말은 서리와 같은 냉정함이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그 포켓몬의 기백은 폭풍우 속에서 넘치는 거센 파도나, 장마첫 빗줄기같은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붉은 갸라도스는 그 앞에 서서 긴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서로간에 이정도로 미움이 번져버린 상황이라면 더이상 이야기는 수단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밀로틱의 사납고 고고한 눈초리에 지지않기 위해, 갸라도스는 목소리를 좀 더 분명하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이에 무엇이 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여기서 끝낼 수 밖에 없는 일이지."
"......포켓몬 배틀."
"배틀 같은 시시한 문제가 아냐. 이건 성전(聖戰)의 마무리가 될 거야."
*
"잠깐. 누나. 왜 갑자기 수위 위험한 내용으로 전개하는거야. 이 소설 전체이용가라고?"
"내가 아니? 어짜피 이야기 속의 이야기 전개니까, 적당히 하면 되잖니."
갓 써낸 짤막한 내용을 인쇄한 뒤, 종이를 몇번 팔락거리며 잉크를 말린 라기는 소년에게 그것과 검은 볼펜을 건네주었다.
세이지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동안의 이야기 전개를 되짚었다. 분명 빈티나랑 잉어킹은 사이가 좋았던 것 같은데, 몇장 사이에 신파극을 찍기 시작한거지. 이대로 싸워도 괜찮은거야? 자신에게 종이를 넘긴 라기는 포켓몬들 나눠줄 포핀이나 사야겠다며 가벼운 걸음으로 세이지를 떠난지 오래였다. 어쨌든 이걸 잇고나서 다음 사람에게 넘겨줘야만 했다. 다음 타자가 누구더라, 다음 타자...선명한 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관동지방의 트레이너, 세렌이었다.
"그 누나라면 내가 엉망진창으로 쓰더라도 어쩐지 수습해줄 거라고 생각해~"
"삐이."
옆에 있는 데이지가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게 웃는 자신의 트레이너에게 핀잔 담긴 소리로 울었다.
*
"크아아아앙!"
초초초열라짱쎈 밀로틱이 울부짖었따. 순간 밀로틱의 오색찬란한 껍질이 굉장한 기세와 함께 와장창 깨졌따.
붉은 갸라도스는 깜짝 놀라서 입을 쩌억 벌렸다. 안에서 나온건 핫핑크색의 가이오가였다!!!
"밀로틱이 사실...가이오가?!"
"그렇다 나는 가이오가... 호연지방을 주름잡는 최강 물타입 포켓몬 가이오가님이시다."
"진짜 밀로틱은 어떻게된거지?!"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내라!"
초초초열라짱쎈 밀로틱 아니 가이오가가 우렁차게 다시한번 울부짖으며 몸부림쳤다. 전장의 바위와 파도가 마구갈라지고 요동쳤따.
엄청난기세로 일어나는 물보라를 보고 붉은 갸라도스는 당황했따. 그기술은 분명 전설속의 전설으로내려오는ㅡ '근원의파동'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가이오가는 진퉁 가이오가였던 것이다! 사나운 물의 파동이 안절부절하고있는 붉은 갸라도스에게 덮쳐왔따.
*
"좋아! 요즘 유행하는 n세대체로 써봤어!
세렌 누나한테 가져다줄래?"
소년은 건성 반 장난 반으로 이어적은 소설을 돌돌 말아 빨간 리본으로 묶은 소설 한 장을 작은 포켓에 담아, 자신의 이브이의 목에 걸어주었다. 듣기에는 이브이를 좋아하니까 소설의 신세를 망쳐놨어도 데이지가 애교라도 부려준다면 어쨌든 화내는 일은 없지 않을까. 내내 심기불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작은 이브이가 폴짝폴짝 뛰어 저편에 보이는 세렌에게 뛰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세이지는 테이블에 올려져있는 복슝열매 드링크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였다.
일그러진 하늘에 얼음의 꽃이 피었다. 익히 알고 있는 용암마을의 소녀가 피워낸 꽃이었다. 세이지는 굉음을 두르고 흔들리는 땅 위에서 자세를 바로잡고 상공을 누비는 거대한 자태의 포켓몬을 바라보았다. 반골 포켓몬 기라티나. 검은 피막 날개에 붉은 송곳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나 있고, 잿빛의 몸을 유연하게 감고 있었다. 저것이 언젠가 읽은 신오 전설의 책자에서 기록되어 있던, 반전세계의 지배자. 트레이너와 포켓몬들을 압도하는 프레셔는 지금껏 보았던 어떤 포켓몬들보다 웅장하고 매서워 미지의 공포에 금세라도 잡아먹힐 것 같았다.
"대단하네."
전승되어오던 이야기로는 기라티나는 분명 고스트 타입에 드래곤 타입을 겸한 포켓몬이었다. 포켓몬 대 포켓몬의 배틀으로 생각한다면 약점을 노릴 구석이 없지는 않았다. 고스트 타입이라면 악타입으로 대응하는 것이 안성맞춤이리라. 아군에서 드래곤이나 페어리 타입, 혹은 강철, 얼음타입의 기술을 쓸 수 있는 포켓몬들은 강력한 아군이 되어줄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평범한 포켓몬이어야 뭐라도 통하겠지. 지라치를 상대했을 때보다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닌가? 소년이 상황을 보느라 주저하는 사이에 은비를 포함한 트레이너들의 맹공을 얻어맞으면서도 기라티나는 한숨 돌릴 기세도 보이지 않고 사나운 기백으로 크게 울부짖었다. 곧 이어 신의 부름에 응답하듯 하늘에서 용성군이 쏟아져 내렸다.
"조심해요!"
라티아스의 힘을 빌어 소환한 용성군으로 아슬아슬하게 맞대응하고 있던 에뜨와르가 뒤를 돌아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반사적으로 은비의 앞을 막으러 달려가려던 소년 대신 한 발 빠르게 움직인 포푸니라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소녀를 짓누를 것 처럼 떨어지던 유성을 갈라 깨부수었다. 은비가 포푸니라도 키우고 있었던가, 생각했으나 소녀의 연분홍빛 눈동자에 당황한 기색이 어려있었다. 은비의 포켓몬이 아닌가? 상황이 어쨌든 공격하는 선에 서 있을 트레이너들을 보조할 방어할 손이 점점 모자란 것은 사실이었다.
"그거 네 포켓몬?"
"세이지 오빠?"
"영 트레이너를 보는 시선이 나쁘네. 뭐, 포푸니라니까 종특일까 싶지만."
트레이너, 잘 지켜주라고. 소년은 몬스터볼에서 가장 익숙한 파트너일 개굴닌자를 불러들이며 멀거니 서 있던 은비와 포푸니라에게 눈웃음 치면서 몇마디 던졌다. 상공을 노리고 쏘아올려지는 트레이너들의 두번째 공격에 대응하던 기라티나는 크게 날개짓하여 바닥에 뛰어내리듯 다이빙하더니, 돌연 기라티나 자신의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어가듯 사라졌다. 언젠가 TV에서 방송하던 배틀 토너먼트에서 본 적이 있는 기술이었다. 시전하는 포켓몬이 상상을 초월하게 크기가 크고 웅장해서일 뿐이지, 분명 그 기술과 같았다. 견제할 상대가 모습을 감추자 저만치 앞서있던 에뜨와르가 뛰어와 은비의 상태를 확인하고 세이지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세이지. 땅 속으로 뛰어들었어, 기라티나가!"
"고스트다이브 같은데."
"평범한 포켓몬과 같은 기술만 쓸 확률이 있을까요?"
"설마~ 전혀 다른 위력일 걸. 긴장해야겠네."
소년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으레 이름 좀 날린다 싶은 포켓몬이라면 장기자랑 하나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것이 기라티나가 스스로 자아낼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일 것이고. 앞서있던 아큐물라가 다급한 소리로 모두에게 다음 공격에 대비할 것을 지시했다. 잠시동안의 고요함을 깨고 유령이 호소하는 듯한 기라트나 특유의 울음소리가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위험예지에 탁월하게 재능이 있는 데이지의 귀가 곧 쫑긋 세워져 파르르 떨리자, 세이지는 마가렛에게 손짓했다.
"악의파동으로 바닥을 덮어!"
완전히 막지는 못하더라도 상쇄할 수 있을 만큼은 상쇄해야지.
개굴닌자가 사뿐하게 몸을 돌려 바닥을 짚어 주변에 서 있는 몇몇 트레이너들과 포켓몬이 서 있는 바닥을 검은 파동으로 감쌌다.
하늘에 피었던 얼음의 꽃에 감탄하고 있는 것도 잠시였다. 기라티나는 바닥으로 빠져들 듯 잠수했고, 곁에 있던 세이지가 은비와 에뜨와르에게 조잘거리다 개굴닌자에게 지시한 악의 파동으로 바닥을 덮었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솟아오른 기라티나의 돌격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트레이너들이 포켓몬이나 다른 이들에게 감싸져 몸을 지키는 모습을 보는 동안에도 라기는 내내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겉으로 기라티나가 일으켜낸 풍압이 덮쳐오자 그녀의 비비용이 날아올라 산들산들 춤추며 폭풍으로 대기를 안정시켰다. 전설의 포켓몬은 전설인 만큼의 무서움이 있었다. 경이로운 대상. 신과 같은, 혹은 신 자체일 그 존재. 하지만 그런 존재를 앞에 두고 겁에 질리기에는 이미 유사한 경험을 몇 번이나 거친 적이 있다. 하물며 주변에는 이미 시아나 벨세즈처럼 프리져 같은 관동의 전설을 데리고 있는 트레이너도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것이 이상했다.
"비비, 한번 더 나비춤."
여린 목소리로 비비용이 사랑스럽게 대답하고 트레이너들 사이에서 우아하게 날개짓했다. 나비춤이란 벌레 타입 특유의 의식은 날개의 움직임을 부드럽게 풀어주고 비비용의 마음을 보다 안정적이게 만들어 줘서 폭풍을 보다 자유롭게 다룰 수 있어, 기라티나가 일으킨 풍압 때문에 산만해질 아까같은 상황에서 라기의 보조를 도와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곁에 있던 새하얗게 무장한 메가다부니에게 별도의 지시 없이 다시 눈짓하자, 기라티나의 다이빙에 잠시 압도되었던 아마루르가와 라프라스가 부드러운 치유의 파동에 감싸져 기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아큐물라의 앱솔이 천사와 같이 깃을 활짝 펴고 뛰어오르는 것을 선두로 다시금 트레이너들의 공격들이 시작되었다. 재차 얼음의 꽃을 상공에 피워내기 위해 두 아가씨들이 부지런히 움직이자, 세이지가 그 곁을 엄호하기 위해 개굴닌자에게 물수리검을 지시하는 것이 보였다.
"이제 초봄도 지났고, 신오지방에도 꽃의 시기가 오는구나. 꽃향기마을의 벚나무들도 화사하게 피어날 테지..."
"누나 완전 여유롭네... 슬슬 꽃나들이 생각이나 감상은 그만두고 돕지 그래."
"세이지랑 다르게 아까부터 돕고는 있었거든."
소년의 벚꽃색 눈동자가 시선을 흘리는 것을 모른 척 하면서 라기는 양 옆의 얼음타입 포켓몬들에게 손짓했다. 미려나 아마, 둘 다 얼음타입을 겸비한 포켓몬이었고 단 한마리만 데리고 전투에 임한다면 라기는 각자에게 프리즈스킨을 살린 파괴광선이나 냉동빔을 지시하였겠지만, 두 마리를 모두 꺼낸 상태에서는 좀 더 장기를 살린 파격적인 공격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녀의 손짓에 먼저 반응한 라프라스가 강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물줄기를 쏘아올렸다.
"물기둥을 만들어서 날개를 노려!"
맹렬한 기세로 높은 상공에 떠오른 기라티나를 요격하는 것은 충분히 힘들었기에, 몇 번이나 쓰기는 힘들었지만 유효타를 더 낸다면 충분했다. 미려의 하이드로펌프에 이어 대기하고 있던 아마가 찬 기운을 내뿜어 물줄기를 타고 올라가도록 냉기를 쏟아냈다. 아마루르가 계열의 강한 냉기를 가진 얼음타입 포켓몬이 드물게 쓸 수 있는 빙결계열의 기술이었다. 곁에 있던 세이지가 잠시 탄성을 내뱉었다. 라프라스에서부터 시작되어 지상 반대의 세계에 살던 신에게 닿은 긴 얼음의 창이 솓아올라 냉기로 기라티나의 촉수와 같은 여섯쌍의 날개 언저리를 빠른 속도로 얼리기 시작한 것이다.
"저걸로 완전히 얼까?"
"생각보다 제대로 된 것 같진 않아. 그렇다면 잠시 움직임이 더뎌질 뿐이지만...."
일순간 무뎌진 촉수의 움직임에 기라티나가 가볍게 몸부림쳤다. 그와 동시에 라기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얼음 창의 바로 밑에 서 있던 미려와 아마는 트레이너의 신호를 듣고 곧바로 냉기를 품은 파괴광선과 냉동빔을 쏘아올렸다. 이어 한 바퀴 다른 트레이너들의 공격을 보조하다 곁으로 날아온 쉘에게 눈짓하자, 강철처럼 날카롭게 연마된 날개를 세우고 포효하던 보만다는 빠르게 상공을 가르고 기라티나를 물어뜯기 위하여 돌진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타겟이 주춤하는 사이에 열심히 공략할 수밖에 없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정돈하며 라기가 발치에 버텨 트레이너를 수호하듯 서 있는 도치마론에게 중얼리듯 속삭였다.
"그렇다면 어서 끝내고 가야하지 않겠어, 봄을 맞으러."
:: 지금까지의 여행을 기록하시겠습니까? ::
▶ [네] [아니오]
신오지방에서의 여행이 종료되었다. 호연에서 빈사상태에 빠져서 맞이했던 첫 여행의 커튼콜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제대로 포켓몬들과 함께, 스스로의 힘으로 루네시티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잿빛도시의 선착장에서 내려, 익숙한 파도와 갈모매들의 소리를 듣고 겨울의 기색 하나 다녀가지 않은 것 같은 봄날에도 여름과 같은 세상으로 돌아왔다. 포켓몬센터 근처에서 대기중이었던 둥실라이드는 이브이와 함께 걸어오는 트레이너를 금세 알아채고 다가와서 선뜻 머리 위를 내어주었다. 간만에 만나는 파인을 어루만져주며 세이지는 둥실라이드와 함께 바람에 몸을 맡겼다.
새파란 하늘 위를 건너는 사이 지상에는 오래 보지 못했던 파랑과 초록이 가득했으며, 익숙한 해변이나 작은 섬들을 몇 개 지나니 곧 암석의 벽에 둥글게 쌓인 루네시티의 모습이 보였다. 컨디션이 괜찮은 날이라면 느릿느릿 걸어나와 낚시대를 드리우던 꽃밭 위에 조심스럽게 착지하고, 이제는 스스로 올라가도 문제 없는 긴 계단을 한참 올라서 커다란 메타그로스가 볕을 쬐며 낮잠을 자고 있는 집의 하얀 벽돌담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누르자 곧 카이가 문을 열어 세이지를 맞이 해 주었다.
"어서 와라. 늦었네."
"포켓몬센터에서 이것저것 정리할 게 있어서."
"일층에 스노우랑 아버지 와 있다. 고모님이랑."
"으, 주방에 앉을 곳도 없지 않아? 좁아 터지겠네."
부츠를 벗고 따라 들어오는 이브이의 발을 수건으로 닦아준 뒤 현관을 지나자마자 고개를 돌려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형인 카이와 세이지 둘이서 살고 있던 집에는 그다지 손님이 오는 경우가 없고, 카이는 현장조사 업무로 집에 붙어있는 날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금전적인 문제와 겹쳐 형제에게는 그렇게 큰 집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거실이 따로 존재하지 않아 드물게 손님이 온다면 주방으로 데려갔고 그나마 마련된 의자가 가득 찰 일도 없었기에 소년은 집안의 이런 분위기가 크게 어색했다. 현대적이고 서민적인 디자인의 의자에는 좌석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 사람이 앉아있었다. 라기, 그리고 아버지, 또 나머지 한 명은...
"고모님 오셨어요?"
"세이지! 신오에서 지금 돌아온거니? 건강은 좀 괜찮고?"
"요즘은 괜찮아요.... 이번 여행도 무사히 끝냈고. 아버지랑 누나 보러 오신 거예요?"
"그래. 설마 네 아버지가 기어이 스노우를 찾아올지 몰랐는데 말이다."
"거 참 아쉬워 죽겠다는 표정이시군요. 리버 누님."
"안다면 저지르기 전에 생각을 해야하지 않았을까, 리드?"
은발을 화사한 보석으로 치장된 비녀로 틀어올리고 흰 실크 드레스를 입은 중년의 여성은 카이가 마악 내어준 찻잔의 손잡이를 부드럽게 쥐고 바로 곁에 앉아있는 소년의 아버지를 힐끗 바라보았다. 소년이 없는 사이 집안 문제로 말다툼이 몇 번이나 오고갔는지 아버지의 미간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그의 곁에 앉아있는 라기는 두 사람의 신경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한 표정으로 카이와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세이지는 속으로 혀를 찼다. 가주계승 문제로 몇 달도 안 되어서 변덕을 부렸으니 당연한 결과다. 가주가 이 난리를 치고 있으니, 그 전까지 실질적으로 가문을 돌보고 있던 고모님이 호연지방에까지 출두하게 된 것이겠지. 앉을 자리도 더 없겠다, 간신히 돌아와서 복잡한 문제에 얽히기 싫었던 세이지는 어색한 분위기에서 냉큼 이브이를 줍고 계단을 올라가며 반쯤 건성으로 인사했다.
"올라가 있을게요. 다녀왔습니다!"
짧은 2층 복도에 도착해 하늘빛의 페인트가 칠해진 나무 문을 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자, 여행을 떠나기 전과 별다른 점 없이 포근한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세이지의 귀환 전까지 카이나 포켓몬들이 틈틈히 청소해 두었는지 먼지가 퀘퀘하지는 않았다. 늘어지게 하품하는 데이지를 보드라운 침대 위에 먼저 올려주고, 자켓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가방을 열어 살펴볼 물건들을 몇 개 꺼내고 의자 위에 얹어두었다. 침대에 걸터 앉아 창문을 활짝 열고 보이는 안뜰에 몬스터볼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엔트리의 포켓몬들이 휴식할 수 있도록 풀어준 뒤 앞뒷발을 쭉 뻗고 늘어진 이브이의 곁에서 소년은 도감과 모험노트를 펼쳐보았다.
신오지방에서 모은 체육관 배지 수, 8개.
도감에 등록한 포켓몬의 수, 252마리.
신오지방 지하기지 랭크, 5랭크.
신오지방에서 모은 콘테스트 마스터랭크 리본의 수, 5개.
마지막으로 레포트를 작성한 장소, 깨어진 세계.
"레포트, 정신없어서 안 쓴지 오래 되었네."
펜을 들어 모험노트의 마지막 기록 밑에 루네시티에 도착한 일을 깨작깨작 덧붙여 쓰면서 소년이 느긋하게 웃었다. 천재와 범재, 기라티나. 세계의 멸망. 박사의 쌍둥이 형제는 어디 갔을까? 레이 박사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고, 기라티나의 행동은 다시금 신오를 위협하게 될 것인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알 방도가 없었다. 자신은 이제 마악 두번째 발을 딛은 트레이너였으니까. 그러니까 우선은 다시금 봄이 온 것을 기뻐하기로 했다.
"일단 오늘은 다리 뻗고 쉬도록 할까."
나중일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자.
이제는 소년 역시 미래를 생각해도 괜찮을 것이다.
깨어진 세계에서의 사건을 뒤로 하고 스노우의 일을 위해서 루네시티에 들렸던 라기는 돌아온 세이지의 모습을 확인하자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오가 되기 전에 루네를 빠져나가, 끈덕지게 아쉬운 시선을 거두지 않는 리드가 고모님에게 붙잡혀있는 사이에 관동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관동에서 호연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는 편이었으나 신오만큼은 아니었고 카이 역시 관동으로 돌아가는 길에 함께 하기로 하였으니 그의 쾌속선 패스포트를 빌리면 금세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잿빛시티에서 담청시티까지 향하는 선박을 거쳐서 다시 포켓몬을 타고 금빛시티로 공중날기. 열차를 타고 관동지방의 노랑시티에 도착해서 늦은 점심식사를 끝내고 카이의 메타그로스를 타고 회색시티까지 가는 내내 라기는 카이에게 한 마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처음 자신의 기억에 대해, 스노우로써의 자신에 대하여 신오지방에서 털어놓았을 때에도 청년은 이미 알고있었다는 듯 별다른 리액션이 없었고, 내내 카이가 맡아두고 있던 차기가주의 자리를 내내 가문 밖에서 지내던 자신이 돌연 가져가겠다고 선언했어도 이렇다 할 거절을 하지 않았다. 폄범한 사람이었으면 화를 냈을텐데. 이제 완전히 찾아온 봄볕에 피어난 회색시티의 꽃들이 찬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화단을 지나며 라기는 앞서 걸어가는 청년을 느릿느릿 불렀다.
"카이."
"왜."
"왜 제멋대로 굴어도 아무 말 하지 않아?"
"참는 거야. 생각없이 제멋대로 굴고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무심하게 내뱉은 질문에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왔다. 양 옆을 걷던 이상해풀과 도치마론이 서로를 번갈아보며 눈치를 교환하는 모습에 라기가 헛웃음을 흘리며 청년의 대답에 재차 질문을 던졌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거야."
"너야말로 내가 너를 몇 년이나 봤다고 생각하는 거냐."
큰 상록수로 이뤄진 길을 따라 걷고 미묘한 하나어를 쓰는 청년의 익숙한 집 앞을 지나 야생 포켓몬들이 살고 있는 풀밭이 저 멀리 보이는 회색시티의 외곽까지 빠져나온다. 갈색 돌담 너머로 보이는 정원이 아름다운 주택이 남라기의 집. 어떻게든 여행을 끝내고 다시 회색시티로 돌아오는구나. 그녀가 뒤늦게 몰려오는 여로의 고단함에 작은 한숨을 흘리는 찰나 앞서 걷던 카이가 몸을 돌려 라기를 바라보았다. 라기의 것과 비슷한 색의 파란 눈동자가 시선을 마주해오자, 잔잔했던 그녀의 시선이 날붙이처럼 날카로워졌다. 헛소리 하면 한대 치겠다는 신호였지만, 카이는 라기의 반응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네가 지금까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했거든."
"그런 선택이라는 게 뭔데."
"남라기가 아닌 스노우의 인생을 살겠다는 선택."
저녁노을이 지는 방향에서 쏟아내린 빛이 몸집이 큰 청년에게 가려져서 어두운 그늘을 만들어냈다. 카이의 표정은 평소처럼 평온했지만, 라기는 그가 울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무는 햇빛을 등지고 서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몇 발자국 떨어져있는 라기의 구두 끝에 걸렸다. 얼핏 그림자에 닿은 발 끝이 차갑게 느껴져, 이제 돌아가는 겨울이 다시금 발 밑에 맺히기 시작한 것 같았다.
"정말 괜찮은거냐? 선생님이랑 아주머니가 슬퍼할 거라고.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그런 문제로 우울해 있었니? 완전히 떠날 생각까지는 없는데. 난 여전히 남라기야. 쓸데없이 걱정하지 마."
"이제까지처럼 여기서 살 수 없다는 거 알잖아."
"그렇다고 너랑 세이지를, 아버지를 외면하면서 계속 살까?"
"아버지는 몰라도 나는 네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어. 세이지도 그랬을 거고."
"그러면 어머니는?"
청년의 눈과 마주한 비취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별안간 튀어나온 어머니의 이야기에 카이의 말문이 막혔다. 라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쏘아붙였다.
"어머니 병세가 악화되었던 거. 내가 사라진 충격도 한 몫 했었겠지. 나도 알고 있어."
"아파서 돌아가신 거야. 알고 있잖아. 병 있던 거... 그래서 마름꽃마을에서 따로 살았고."
"세이지도 같은 병 이어받았잖아. 지금 상태로는 그런 환경에서 사는 거, 절대 무리라는 거 알면서."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 거야. 이설시티로 가지 않도록, 가주 자리를..."
"범재인 네가? 무슨 수로 본가의 어르신들을 납득시킬 건데?"
"스노우."
카이는 한숨을 쉬었다. 기억 하나 돌아오기 시작했다고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일전까지라면 전혀 꺼내지도 않을 모욕을 입에 담으며 스노우가 겨울철 피어난 장미처럼, 과거의 어린 모습일 때 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결코 기쁘거나 비웃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언쟁 중에 보기에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청년의 그림자에 스며들어가려는 듯 스노우는 뒤로 손을 모으고 몇 발자국 다가왔다.
"너랑 내 예상 외로 우리 막내가 여간 트레이너에 재능이 있어야 말이지."
"혼자서 일어나지도 못하던 애가 갑자기 이것저것 해서 그런거야. 다들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아무튼 난 어릴적에 했던 약속 정도는 지키고 싶거든.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 이어 대답하고 생긋 웃던 스노우는 카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집으로 걸었다. 한참 들리지 않던 청년의 보폭 넓은 발소리가 이윽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을 듣자 스노우는, 라기는 한번 더 유쾌하게 소리내어 웃었다.
"어릴 적에 악속을 했었어, 세이지랑. 그 애가 건강해지면 같이 여행을 하고 성장해서, 배틀을 하자고.
그 애는 용기를 내서 간신히 목숨을 부여잡았잖아. 그렇다면 나도 누나 체면은 살리기 위해 성장해야하지 않겠어."
"그래서 성장의 궤도로 선택한 게 남라기를 포기한 스노우의 삶이라고?"
"내 나름의 성장이란 거지.... 게다가 이설시티에 세이지를 앉혀두면 같이 여행도 할 수 없잖니."
정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으니 정원에서 물을 주고 있던 어머니의 사랑동이가 공중을 헤엄쳐 다가왔다. 라기는 사랑동이의 이마에 입맞춤해주며 반가움에 화답한 뒤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렸다. 곧이어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거실에 있을 어머니가 문을 열어주러 마중나올 동안 그녀는 곁에 서 있는 형제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이제 봄이야, 겨울이 길었지."
".....그래."
"집에 돌아왔더니 나도 너도 어른이 되었네."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나 함께 자라던 소년소녀가 있었다. 커다란 사건으로 소년과 소녀는 헤어지게 되었고, 각자의 겨울에서 숨어 살게 되었다. 자상한 부부에 의해 도움을 받은 소녀는 소년에 대한 사실을 잊고 까맣게 잊고 살았다. 여름정원에서 영원히 태양의 가호를 받고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땅 밑에 잠긴 장미덩쿨의 속삭임에 자신이 누구인지, 소년이 누구인지 기억하게 되었으며, 여름에서 벗어나 겨울의 길에 접어들어 자신의 가장 큰 트라우마를 극복해내고, 소년을 찾을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어느덧 봄이었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소년소녀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어서 오거라. 오느라 고생 많았지."
"할 이야기가 잔뜩이에요. 아버지는 계시나요?"
"거실에 있단다. 목 빼고 널 기다리고 있었으니 저녁 준비하는 동안 상대 좀 해주렴."
걸음쇠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인자한 모습의 어머니가 남매를 맞이했다. 팔을 벌린 어머니를 마주 안은 품 속에서 어머니가 쓰는 특유의 그라시데아 향기가 감돌아서, 깨어진 세계에서 만난 두 명의 형제를 기억해냈다. 자신은 반쪽과 헤어졌고, 반쪽과 재회했다. 레이 박사는 어떻게 할 생각일까. 그리고 자신의 첫 여행, 첫 계기가 되어주었던 다시 만난 일등성은..... 바로 지금부터도 생각할 것이 산더미었다. 여러가지를 부모님께 이야기하고 상담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선은 집에 돌아왔으니 시름은 덜어두고 쉴 것이다. 맛있는 것을 잔뜩 먹고 여로를 풀고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이다. 구두를 벗고 그녀가 어머니와 안으로 들어설 동안 카이는 여전히 머뭇거리며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런 청년에게 라기가 살풋 웃고 손을 내밀었다.
"들어가자, 카이."
"....음."
"집으로."
Sneedronningen
#0 라프라스의 소녀
사시사철 겨울인 마을에서 태어난 카이와 스노우는 사이좋은 쌍둥이 남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스노우는 미혹의 숲에서 작은 눈꼬마를 만나게 되고, 하리라는 별명을 붙여주게 됩니다.
하리는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얼음귀신으로 진화를 할 정도로 성장했고, 스노우와 각별한 사이가 됩니다.
스노우는 우등생이었으나 집안의 규칙을 무시하면서까지 얼음귀신과 함께 첫 모험을 떠나고 싶었고,
그것은 곧 가출계획이 되어 호연지방으로 이사가는 어느날 밤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하지만 뜻밖의 사고로 스노우는 이성을 잃은 얼음귀신에 의해 가족들과 헤어지게 되었으며
우연하게 라프라스에게 구조되어 도움을 받고 중년 부부의 손에 거둬져 자라게 됩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공격을 당하고, 눈 앞에서 동생이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된 스노우는
큰 충격을 받아 본인의 이름조차도 기억과 함꼐 잃어버리게게 되었습니다.
부부는 가엾은 이 라프라스의 소녀가 태양 밑에서 축복받으며 행복해지기를 빌고,
해바라기와 같은 여자아이가 되도록 '라기'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1 관동, 성도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의 그늘에서 살던 라기는 17세의 여름 관동의 트레이너 캠프에 떠밀려 나서게 됩니다.
캠프에서 도치마론, 하리와 만나게 된 라기는 다양한 경험을 쌓을 것을 독려받아 부모님의 배웅을 받고 첫 여행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관동과 성도, 가을을 지나서 처음 맞이하는 홀로 서는 겨울은 차갑고, 두렵고, 냉정했습니다. 소중한 추억 만큼의 괴로움도 함께 쌓였습니다.
그 사이에서 라기는 차츰 변화를 겪게 되고, 스스로 태양 아래 서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봄이 지나 찾아온 여름. 라기는 여름의 정원에서 스노우를 알고 있는 장미 한 송이를 만나게 됩니다.
부부는 붉은 장미가 라기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할 것을 염려하여, 장미에게 그녀의 과거를 함구할 것을 막아둡니다.
#2 호연
그렇게 영원히 여름의 정원에 머무를 것 같았지만, 세 번째 호연에서의 여행을 통해서
자신의 실수로 크게 다쳐 죽음의 문턱 앞에서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동생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라기는 가장 가까이에서 지내고 있었으나 긴 시간동안 알아보지 못했던 카이의 흔적을, 발자취를
별의 기적과 함께 서서히 기억해내기 시작합니다.
멈춰있던 라기는 장미덩굴의 길을 따라 여름의 정원에서 벗어납니다.
자신의 실수로 죽은 줄만 알았던 막내동생을 어떻게 해서든 단단히 붙잡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라기는 그로 인하여 자신이 잊고 있었던 자신, '스노우'를 기억해내기 시작합니다.
#3 신오
시간은 흘러 다시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신오에서 맞이하는 추위는 작년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동생은 기적적으로 눈을 떴지만 여전히 불안정했습니다. 금세라도 다시 꺾여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라기는 몇 번이나 관두고 싶어했습니다. 다시 여름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모른척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별의 기적으로 만났던 동생의 마음이 이정표가 되어, 숱한 고난 속에서도 이겨낼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에
라기는 스스로의 힘으로 처음 무언가에 도전해보는 것으로, 용기를 내어 부모님에게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겨울의 끝(선단)에 도달하게 된 라기는, 트라우마의 중심에 있었던 얼음귀신과 마주하게 되고
스스로의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게 되어 얼어붙었던 심장을 녹여 마음을 꽃피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둠이 파도치던 지상에도,
한송이 그라시데아 꽃이 활짝 피어나 온기가 바닥에 스며들고 태양이 뜨는 봄의 아침이 찾아왔습니다.
긴 시간에 걸쳐 라기는, 스노우가 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카이와 재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어른이 되어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