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숲의 샤론
2021. 2. 2.
#. 2021.02.02
도노반 매켄지와 샤론 블루에 대하여
눈 앞의 남자가 말했다.
"그럼에도 제가 생각한 형태를 듣고 싶은 걸까요?"
때때로 청년의 시선 끝에 어떤 감정이 맺혀 있고,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의문스러운 시선에서 궁금증이 솟아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샤론은 태생이 호기심이 많았고 호감을 가진 타인을 알아가는 것을 좋아했다. 아카데미에 떠도는 학생들이나 포말하우트에 대한 가십거리가 디저트로 나온 시폰 케이크를 한 입 머금고 음미하며 조잘거리는 화젯거리로 제격이었던 것도 그런 성격을 만드는 것에 한몫하였다. 그렇지만 도노반 매켄지와 유지하고 있는 미묘한 천칭에서 샤론은 '알아가기 위한 권리'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유였다. 도노반이 스스로의 일을 타인에게 노출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니까. 그런 이유였다.
그녀가 탐탁지 않은 반응이 돌아오거나 입을 닫는 모습을 보고 난처하리만치 달라붙어서 떼를 쓸 성정도 아니었다.
어떠한 관계에서는 '내려놓음'이나 '기다림'이라는 것이 필요하고 사교의 천칭 위에서 어떠한 조건의 부재가 오로지 관계의 종말을 불러오는 것이 아님을 소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하지 않는 일이라면, 혹은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물어보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도노반 매켄지의 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정도의 정중함이 필요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그가 자신의 일을 대답하기 시작한 뒤부터는 상황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복잡한 수식이나 조악하게 얽힌 실타래를 풀어가는 것처럼 그녀는 어떤 실을 잡아당기고 어떤 열쇠를 골라야만 알맞은 것이 정답인지 청년을 탐구해야만 했다. 맞지 않은 것을 고른다면 금세 이 청년은 입을 다물고 거리를 둘 것이다. 그런 결말은 바라지 않았다. 샤론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좋아했고, 그 안에는 도노반 역시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녀는 중간 수를 두었다. 도노반의 감정은 샤론에게 중요하였으나 그것을 담은 그릇이 어떤 형태인지는 알아가지 않아도 괜찮다.
샤론 블루에게 있어서는 스스로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타인의 감정은 멋대로 주무르고 휘어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차를 담을 찻잔을 고르는 것은 테이블의 주인이었다. 손님이 왈가왈부해서는 안 될 일이지.
대부분의 일에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청년을 두고 보면 더욱 그래야만 했었다.
그러니 그것이 연정이든, 오랜 시간을 끌어안고 싶은 일종의 애착이든, 평범하고 다정한 우정이라도, 애매하게 뒤틀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감정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듣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도노반은 제법 예전부터 샤론의 일을 중요하고 특별한 일이라고 말해주고 있었으며 그녀는 일말의 의심 없이 그것을 믿었다. 파동을 읽거나 의심하는 일은 없었다. 그가 건네는 말이, 행동이, 그 모든 것이 '소중함'을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렇게 구구절절 미사여구를 붙여 장황히도 늘여 놓았지만 말인즉슨...
'물어 볼 생각 없었다고.'
당최 몇 번을 그에게 이야기 해야만 오가는 대화에서 안심을 하는걸까? 샤론은 땅이 꺼져라 한숨이라도 내뱉고 싶었지만 평소와 같이 잠잠한 표정을 유지하고 그에게서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마른 제 입술을 몇번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어두워진 창 밖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내뱉은 말은 평소의 정중함이나 허례허식을 거둬버린 모양새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조를 생각 없어요. 그렇게 간절하지 않거든요.
도노반에 대해 관심이 없다거나,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괜찮다고요. 도노반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저는 상관 없어요.
당신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그건 긍정적인 마음일 것이고 저는 그것에 감사하면서 존중해요."
"...계속 그렇게 말씀하셨죠."
"맞아요. 제가 궁금해 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예요. 궁금하지만 답을 바라진 않는 거라고요.
도노반이 그런 제가 알 수 없는 감정 때문에 저에게 뭔가 대단한 사고를 친 것도 아니고. 답답해서 고구마라도 한 사발 먹고 있는 기분이지만..."
창 밖의 달빛은 무던히도 밝았다. 보름달이 지나가고 며칠 지나지 않은 탓이려나, 소녀는 고민이 쌓일 때마다 그래왔던 것처럼 숲의 눈에 푸른 달빛을 한가득 머금었다. 무언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필요한 용기 한 줌을 달빛에게서 소중히 받아 챙긴 다음 샤론은 눈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불을 밝히기 위해 피워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촛대는 어느새 녹아 불씨도 작아져 바라보는 시선이나 표정이 분명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안심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애매한 실소를 머금었다.
"요즘에는 좀 알 것 같아져서요."
"뭘요?"
"도노반은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저에게 자꾸 듣고싶지 않냐고 물어보는 것 같거든요."
"...그게 왜 그렇게 해석됩니까."
"솔직히 대답해요. 대체 저랑 뭐가 하고 싶어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용기가 안 나서 그러는 게 맞잖아요.
제가 뭐 좀 말했다고 도노반을 잡아먹나요, 포말하우트 오빠처럼 바가지를 긁나요? 자기 입으로 언제나 다정하다고 했으면서."
장난스럽게 튕기던 목소리를 거두고 소녀는 한 번 심호흡했다.
저 나름대로 솔직히 말하고 있는 거지만 여기서 진지하지 못하면 이 사람 토라질 것이다. 분명히.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도노반이랑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까요.
어디로 향할 것인지, 어떤 것을 보고 듣고 느낄 것인지. 그리고 아침식사는 어떻게 할 지, 내일은 무엇을 하고 지낼지...
뭐 그런 것들이요.
아직도 그 많은 것들을 위해 확실히 해둬야 하는 감정이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뭔가 정리해 둘 것이 있다면 지금 정리해요. 도노반이 그게 편하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