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6 시그드리파

2022. 5. 16.

 

 

#. 2022.05.16
Snegurochka

 

 

 "후회나 미련이 없었으면 좋겠어. 너, 그리고 모두에게. 5년이 있었잖아."

 

 

5년. 얼마나 짧고 긴 시간일까. 천 년을 살아가는 용에게는 일 년이 하루 이틀 정도의 감각으로 무디게 새겨지는 정도의 것일지도 모른다.

지상에서 순간을 살아가는 것들에 비해 용이란 것들은 대부분 오랜 세월을 살았다. 눈 앞에 있든 창백한 산의 용 또한 다름이 없었으니, 제자가 나지막히 읊는 5년이 무던하게 다가왔어야 할 터였다. 5년 전의 시그드리파라면 주저 없이 그리 대답했을 것이다. 당신은 내 인생의 찰나이며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작은 상처조차 되지 않으니, 그대 역시 나의 존재를 한겨울 잠깐 지나가는 삭풍처럼 여기거라 말할 자신이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누이동생의 저주를 달게 받으면서도 기어이 주둥이를 나불거린 500년 묵은 그 현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 짧은 시간에 시그드리파는 완전히 이 성에 뿌리내린 연약한 들풀들에게 매료되어 버렸다. 철이 지나면 사명을 다하고 민들레 씨앗처럼 흩어져 사라져버릴 것들은 유리온실 안에서 부드러운 햇살과 비옥한 토양을 마련해 주며, 병들고 삭은 잎을 정리하여 알맞은 물을 주고 애지중지 하다 보니 싹은 금세 아름다운 멍울을 맺고 꽃을 피워냈다.

그건 의무나 연민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는 제 스스로 그들에게 무엇이라도 되어보고자 움직이지는 않았는가?

아, 그저 한철 꽃이었다면 바일레가 그리 말하듯 찰나의 추억으로 삼아 흘려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꽃처럼 가꿨을지언정 이들은 꽃이 아니었다.

 

 

시그드리파는 쓸쓸한 표정으로 바일레를 응시하다 말을 이어갔다.

 


"네가 지난 시간의 연장과 완성에 욕심을 낼 수도 있어. 순간이어도 좋은 기억을 가지고 헤어지면 안 되는지, 언젠가 보고 싶은 날에는 추억을 짚어보며 스스로를 달래고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 삭풍에 사무치는 외로움을 무찌르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어. 너의 마음은 나의 것이 아니고 온전히 너만의 것이며, 그러니 내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지.

하지만 바일레, 그러니까 나는 부탁을 하는 거야. 네가 정말 나를 생각해 줄 수 있노라면 제발 그 이상의 정을 붙이지 말아달라고. 깊숙히 숨겨두어야 할 비밀을 드러내면서까지 미움을 사려 하고 호소를 하는 거야. 나는 시그르드처럼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내던지고 욕심내어 움직일 용기도 없으나, 란드그리드처럼 강인해서 사계절이 봄인 것처럼 한결같을 수도 없어. 나는 눈이자 유리며 동시에 근본이 겨울인 것이니까."

 

열 일곱 어린 네레이드를 타이르던 것처럼 목소리는 점점 누그러졌다.
엄하게 대할지언정 시그드리파는 이 온기를 결국은 잔인하게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내게 후회나 미련이 없을 수가 없단다. 너, 그리고 모두에게. 5년이 있었잖아."

 


그저 너희가 떠난 후 쌓인 정에 조금이라도 덜 아프고 싶을 뿐이야. 유리구슬 같이 투명한 파란 눈동자가 물그림자 같은 여인의 실루엣을 느리게 그 안에 담았다.
창에 맺힌 서리에 젖었는지, 온기에 녹아 스몄는지 물방울이 맺혔으나 유리성의 드래곤은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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