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로포스 핀 오리안데

2018. 3. 9.

 

로그 랜덤

 

 

유빙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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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을 시작한 이래 질병형이라고 불리는 것을, 어쩌면 인간이었을 것을 처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아트로포스는 분명 창을, 바람의 화살을, 수많은 물줄기를 뻗어 새의 모습을 한 세이렌과 실프, 높은 고음으로 노래하던 질병형의 말로를 지켜보고 그 끝맺음을 돕기 위하여 존재를 거두었다. 하지만 연구소에서 만난 검은 머리의 여자아이는 특히 잊을 수 없었다. 아마 죽어도 잊어버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짧게 자른 검은 머리, 눈물이 맺힌 붉은 눈동자, 작은 손으로 그나마 의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던 사람들의 옷소매를 붙잡고 여린 목소리로 소녀는 말했었다. 「집에 갈 수 있어?」 그렇다 말하며 아이를 어르고 달래던 일련의 검사를 끝낸 어른들은 소녀에게 대답을 내려놓았다. 「갈 수 없다. 너는 여기서 끝이다.」 그런 말을 하고 검 끝을 겨누는 사람들이었다. 곁을 지키고 있었던 아이아타르님을 찌르고 필사적으로 도망쳐 자신을 가장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님의 곁으로 달려가려고 했었다. 소녀는 자신의 삶에 충분히 용감했고 그러할 권리가 있었다. 그런 권리를 빼앗아 대의의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우리다.

 

테이블에 앉아 경전의 부드러운 커버를 손으로 쓸고 창문 너머의 수평선을 바라보는 청년의 눈이 흔들렸다. 귀에서 누군가 속살거리며 위로하는 것 같았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다. 아이의 상태는 당장 손을 쓸 수 없었고, 그렇다면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의 부모님을, 나아가서는 거리의 모든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 수도 있었다. 더 일찍,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지지 않도록 하늘이 살피고 이 땅에 있는 우리를 대신 보내어 구름 너머로 바닷길을 건너 아이를 룩스님의 곁으로 인도하기 위해 손을 썼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자애로운 목소리에 아트로포스는 질문했다. 

 

 

'하지만 좀 더 많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애의 세계를 지워버렸지 않습니까.'

 

 

에볼루티오의 사람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 아이를 그 자리에서 놓아준다면, 그냥 둔다면 자신의 가족들이 해를 입을 것을 알았기에.

오에일레트의 사제는 침잠했지만 망설이지 않고 선택했다. 아폴리네르에서 함께 자란 둥근 어깨의 소녀는 울면서도 곁에 있는 사람들을 필사적으로 지켰다.

모두가 만났던 그 작은 인연을 거두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안타까움을 품고, 슬픔을 등지고 자신의 것들을 지키기로 선택했다. 자신도 그래야 할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저도 좀더 많은 사람을 선택했지만.'

 

 

아트로포스는 손을 모았다. 긴 시간 오랜 실험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내달리던 아이를 거두는 일련의 장례식에서 자신도 창을 휘둘렀다. 분명하게 자신의 판단에서 좀더 많은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질병형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을 때 가장 먼저 그것이 안심되었으니까. 곁에 있는 동료들이 육체적으로 더 큰 상처를 입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게 부대표의 마나를 기반으로 구축된 심해의 벽에 바짝 긴장되어 있었던 육체는 비로소 피곤을 자연스레 받아들여 편안해질 수 있었고 승리의 기쁨에 웃을 수 있었다. 생물인 이상 죽음에서 간신히 벗어난 기쁨 역시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많은 현실이 「너는 옳은 길을 선택했다」라고 속삭임에도 마음은 인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괴로웠다.

 

창 밖의 세계는 여전하게 황금빛으로 찬란하였다. 이름도 모를 아이 하나가 덧없게 져버린다고 무너지는 것은 어림도 없다고, 한때의 존재를 자연의 일부로 품어 바람결에 한껏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 사이 억센 추위를 두고 거대한 유빙이 조용히 물살에 움직이고 있었다. 황금의 들판에 세워진 그 웅장한 자태를 아트로포스는 소녀의 묘비라고 생각했다. 경전 위에 올려둔 손을 거둘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랜 추위에 베어버린 마음이 호소하는만큼 자신은 소녀를 위해 기도해야만 했다.

 

 

공백포함 1932

 

 

 


 

# 오를란도의 소년

 

 

필로테스 워렌 오를란도는 전통중시적인 성향이 강하고 냉혈한인 인물이었다. 여타 역사성이 두드러지는 귀족 가문들이 그러하듯 오를란도 역시 비마나인과 함께 적은 마나를 타고나는 고위급 이하의 사람들에게 모질게 구는 경향이 있었는데, 필로테스가 가주권한을 잡고 있는 지금 세대에 와서는 유난히 혈통에 대하여 결벽적이었다. 프레테리아의 축복받은 마지막 날 태어난 엘리시아 오를란도 역시 그러한 권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다른 두 형제와 다르게 터무니없이 연약한 마나 회로와 작은 보유량을 가지고 태어난 엘리시아는, 다섯살이 되기 전까지 꾸준히 자신의 위치를 걸고 해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서재에 마련된 천칭의 추에 자신의 마나를 불어넣어 움직여야만 하는 일이었다.

필로테스의 곁을 조용히 지키던 파란 머리카락의 안주인이 막내딸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는데, 모질게 내쳐질 운명에 처한 백야의 아이가 가여워 룩스께서 보살핀 것인지 엘리시아는 남매들 중에서도 유난히 어머니의 모습을 빼닮았다. 이는 필로테스의 얼마 없는 인간적인 면모를 움직였고, 필로테스는 갓난아이를 비정하게 시설에 내다버리는 것 대신에 출생에 대한 사실을 감추고 아이에게 천칭의 추를 움직이는 방법을 꾸준히 가르쳤다.

 

영락없이 천부적으로 혈통을 타고난 언니오빠들에게 이것의 추를 움직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엘리시아는 달랐다. 체내에 머금고 있는 마나의 보유량은 커녕 이것으로 뭔가를 띄울 수 있는 것조차 가끔이었다. 당연스럽게도 결과는 냉정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 엘리시아는 하염없이 울며 아버지에게 빌었으나 그 날을 기점으로 본가가 위치한 엘람에서 멀리 쫓겨나, 이름의 반절을 빼앗기고 하층민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오리안데의 소년이, 오를란도의 막내딸이 가지고 있던 유년의 기억을 그녀의 입으로 간신히 전해듣게 된 것은 소년이 여덟살이었던 해 자신의 집을 방문한 외조부 필로테스가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고 불같이 화를 내었던 새벽이었다. 그 날을 기점으로 아트로포스는 필로테스의 책상 위에서 여전히 중후한 청동빛을 반사시키고 있던 천칭이 그렇게 미워보일 수가 없었다.

 

티보에서의 괴로운 일들에서 일선 물러나 재정비를 준비중이었던 기간, 아폴리네르에서 얼쩡거리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아트로포스는 조사단 재합류에 대한 통보를 받은 뒤에 엘람에 위치한 외조부의 저택을 찾았다. 여전히 시린 햇살이 쏟아져내리는 것을 등지고 앉아있는 필로테스는 예의 그 마나석 천칭을 앞에 두고 거래를 위한 보석을 감정하다가 느슨하게 입을 열었다.

 

 

"재합류가 있다고 했지."

"예."

"두번은 말하지 않겠다, 아트로포스. 비마나인은 멀리하고 모인 자들에게 일일히 정을 주지 말아라.

다른 사제들이나 교주들과 적절히 협력하여 공훈을 세우되, 일정선 이상 네가 나설 필요가 없다."

 

 

내내 천칭을 노려보고 있던 시선을 올려 아트로포스는 자신의 외조부를 마주 바라보았다. 인정하기 싫을 정도로 저의 것을 닮은 눈동자의 빛깔에 그림자가 깔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정 참여는 명예로운 일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일이기도 하였다. 선발되었던 날부터 필로테스는 아트로포스에게 한결같이 지시했다. 공훈은 세우되, 자신의 몫을 챙긴다면 더 나대지 말고 물러나서 안전을 사릴 것. 간단명료하지만 특히 아트로포스에게는 지키기 난해한 것이었다. 조사단에는 카덴샤의 소녀가 여전히 남아있었고, 자신에게도 소중한 인연이 여럿 생겼다. 그들을 제외하고서라도 돕기 위해 자원한 자리에서 새벽 어스름에 잠깐 빛나고 모습을 감추는 새벽별마냥 얌체같이 굴 성미도 아니었다.

 

 

"할아버님."

"그래."

"그거까지는 용납 못 하겠습니다."

 

 

선명한 목소리로 의사를 밝히는 손주의 표정을 턱을 괴고 무심하게 바라보던 필로테스가 조용히 그에 응답했다.

 

 

"거기서 대의를 이루려고 하지 마라."

"대의를 이루기 위해 구성한 조사단이지 않습니까. 저는 이름 한락이랑 같이 정계에 제 실력 어필하려고 참가한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룩스님을 모시는 사제의 위치로 이엘름의 신자들에게 닥친 재앙에서 안전과 평화를 되찾을 실마리를 찾기 위해 지원한 겁니다."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지 말아라, 아트로포스. 나는 너한테 소비형 말이 되라는 의도로 원정을 허락한 것이 아니다.

국가가 맡긴 대의에 성의를 보이라고 했지 죽어 시체가 되어 돌아오는 전쟁영웅이 되라고 말하지 않았다.

네가 오를란도의 장손으로 있는 이유를 생각해라."

 

 

필로테스는 보기 좋은 금술이 늘어진 의자의 팔걸이를 짚고 일어나 청년의 앞에 허리를 곧게 펴고 버텨 섰다. 책상에 앉아 서류만 뒤적거리고 있는 노인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외조부는 넓은 어깨와 큰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 풍채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피로 얼룩졌던 어머니의 모습이 비집고 나오기 시작하자 아트로포스는 다시금 위축되기 시작했다. 무자비했던 그 손은 청년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오를란도의 가주는 촉망받는 미래를 가지고 태어난 손자를 조용히 타일렀다.

 

 

"나는 너에게 오를란도의 명예를 맡겼지 오리안데라는 이름의 영웅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공백포함 2,549

 

 


 

 

#아침 단상

 

아침 예배를 드리는 행위는 익숙했다. 비단 아트로포스가 사제라는 위치에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엘름은 신성국가이며 어떠한 이단이 아닌 이상 높은 상류층에서부터 밑바닥인 인생까지 신에 대한 예배나 그를 섬기는 방법과, 룩스의 존재를 잊거나 외면할 수야 없었다. 행동의 됨됨이가 건실한 사제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신자라고 한다면 아트로포스는 신실한 축에 속했다. 검은 산의 원정을 위해 꾸려진 조사단 사이에서 생활할 때에도 아침 예배를 언제나 거르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평상시에 드리는 예배 시간이 날이 지날수록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벌써 여럿에게 지적된 바 있지만 아트로포스는 조사단의 일에서 진행이 더딘 것과 이렇다할 성과가 없는 것이 초조했다. 본인의 문제는 둘째였다. 외조부인 필로테스는 분명 아트로포스에게 이번 조사단에서 뒤쳐지지 말고 일정한 성과를 거둘 것을 재차 각인시켰으나 청년는 기본적으로 명예보다 정을 우선시하는 성격이었다. 엇갈림이 있었지만 어쨌든 조사단에서 만난 소꿉친구에게 그녀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연구소에서 전염병에 대한 관련 자료를 엿본 것을 통하여 크림하트의 부모님이 그녀를 한결같이 기다려줄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전염병에 대한 단서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잡아야 할 판국인데, 원래부터 성질이 급하고 많은 것에 혈기왕섬함을 내세우는 아트로포스가 이를 선선히 인내하기에는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청년이 선택한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는 방법은 룩스에게 기도하는 것이었다. 본인의 한풀이를 위해 신에게 투정을 부리는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투덜거리거나,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요란스럽게 징징댈정도로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약식으로 꾸민 막사 안의 제단 앞에서 아트로포스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제단을 벗삼아 갈 곳 없는 말을 하늘 저편에 있을 신에게 고해성사라도 하듯 털어놓기 시작했다.

 

"성과가 없는 거는 아니죠, 뭔가 수상한 사람도 찾았고.

전염병 관련자료도 찾았구요. 이제까지 선발대로 나섰던 사람들이,

못 찾은 해결방안이 바로 나오는 거도 아닐거고요. 그치만..."

 

청년은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헤집어 흐트러지게 만들며 앓는 소리를 냈다.

 

"제가 이정도로 무쓸모할지는 상상도 못했어요ㅡ!!"

 

룩스의 은총을 받아 소속되어있는 학파에서도 얼마 없는 두개 이상의 원소마법을 다루는 능력을 타고났다. 졸업 당시에도 나쁜 평가는 없었으며, 행실이 바르지는 못하더라도 계속 어느정도의 인정은 받아왔으니 막상 조사대에 참가하면 한 사람 몫, 아니 두 사람 몫도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치기어린 자만이었지만 잘난 척도 근본이 깔려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부제 시절 돌아다니면서 마법을 유동적으로 구사하는 것은 나름의 장기였기에 간밤에 있었던 사람의 말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묘한 사람과의 전투에서 그정도의 실책을 보였다는 건 창피했다.

 

누가 보면 무안할 정도로 제단 앞에서 있는힘껏 신에게 기도를 방자한 칭얼거리기를 마친 청년은 언제 그랬다는듯이 다시 엉망이 된 머리를 대충 손으로 넘겨 평소처럼 정돈하고 제단의 흐트러진 융단을 바로잡은 뒤 성질을 부리느라 발갛게 물들어버린 뺨을 두어번 손바닥으로 쳐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으면 도움이 되는 수준까지 오르면 될 일이었다. 일단은 다른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청년은 발을 딛고 일어나 창을 들었다. 단련이 필요할 때였다.

 

공백포함 1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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